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가미 요시아키 (문단 편집) == 일화들과 재평가 == 암살과 모략을 즐겨 구사하는 음험한 장수로서의 이미지가 무척이나 강했지만, 근래의 재평가와 사료 연구에 의하면 가족들과 부하 장수들, 영민들에게 매우 따뜻한 지,인,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특히 사람 좋은 영주로서의 면이 강했다고 한다. 군기물에서 일컬어지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평가는 * 요시아키 공은 지·인·용을 겸비하였으며, 그 명성은 매우 높아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다. * 성격이 온유하여 무도하지 않으며, 용맹하며 간사하지 않다. * 무용은 남을 뛰어넘고, 자비가 깊으며 제장을 잘 보살피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등등등. 요시아키의 기존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르다. 요시아키가 분명 암살이나 배반 같은 모략을 잘 구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가미 가문 자체가 쇠락해 비록 아시카가 쇼군의 동족으로 데와를 지배하는 우슈탄다이를 지낸 명문이기는 하나 조부 때 이미 다테 가문에게 항복하여 종속된 상태였고, 주변 호족들은 텐도 요리사다를 대표로 하여 '모가미를 따를 이유가 없다!'며 적대하고 있었으며 영지와 병력조차 거의 없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는 이러한 모략을 쓰는 것은 비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나 젊었을 때는 본인의 성격이 무용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도 있고 병력이 크게 부족했었는지 직접 전열에 서서 돌격해 싸운 적도 많다고 한다. 적군의 대규모 습격에 곤란해진 요시아키는 직접 '''철포를 들고 혼자 뛰쳐나가서 몰래 적장을 저격'''해서 적을 물리쳤으며, 적이 전열을 정비하고 다시 오자 가신들이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직접 '''선두에 서서 돌격'''하여 간신히 적을 물리쳤다. 이렇게 간신히 적을 물리치고 적장의 목을 들고 돌아오자 모가미 가문의 중신인 우지이에 사다나오는 요시아키에게 "다이묘가 그런 추레한 모가지를 얻는들 어디다 쓰겠는가"하면서 격하게 간언했고 그 말을 들은 요시아키가 목을 내팽개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다이묘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그것만한 손실은 없기 때문에 전선에 다이묘가 나서는 건 부하에게 경솔하다고 욕을 먹어도 할말이 없다. 불리한 상황을 전장을 누비며 극복해낸 [[호조 우지야스]]는 자신의 얼굴에 난 여러 칼자국들을 용맹하다고 칭송하는 사람들을 '대장 얼굴에 칼빵이 있는 건 자랑거리가 아니다'라며 물리쳤을 정도이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대장의 신분으로 돌격전을 벌였다는 잘못으로 문책을 당한 적이 있다.] 전쟁에서는 특히 철포의 사용에 능통하여, 2천 정 이상의 다수의 철포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장수들도 철포 전술에 능한 장수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나 하세도우 전투에서 우에스기 가문을 물리칠 때 철포가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라이벌 [[다테 마사무네]]처럼 내정, 특히 치수에 뛰어났으며. 백성들에게도 매우 잘해주어서 요시아키 생전에 단 한번의 잇키도 없었다고 한다. 눈물이 많았다는 말도 많고, 성격적으로도 상당히 온유하고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스타일이었는지 가문의 맹장들과 몸소 씨름을 하는게 취미였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손수 일하는 것도 꺼리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모가미 요시아키의 집 앞에 외국에서 온 사신이 와서 요시아키에게 편지를 가져왔다고 했고, 집 앞에서 일하던 큰 키의 인부 하나가 편지를 가져가려 하자 사신이 "중요한 편지라 직접 만나 전해드려야 한다"고 거절하였는데, 인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잠시 뒤에 모가미 요사아키가 직접 나오는데 아까 그 인부여서 사신이 당황했다는 일화도 있다. 특히 [[5ch|2ch]]에서 가장 유명한 별명은 '[[연어]]님'. 연어를 아주 좋아하고 사랑하여, 가신들에게 보낸 편지들 중에 연어에 대한 언급이 많다. 쇼나이 해안지방을 정복하고 가신에게 보냈던 편지에는 "이제 연어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기뻐했다는 내용이 남아 있으며, 그 외에도 가신들에게 "연어를 보내줘서 고맙다", "연어 맛있었다"고 보낸 편지도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쌀 이외의 세금으로 연어도 받았다고 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다테 마사무네에게도 공물이나 답례품으로서 자주 연어를 보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족들, 특히 여동생인 요시히메를 매우 사랑하여 2ch로부터는 시스콘이라고도 불리운다. 특히나 여동생에 대한 애정을 짐작케 하는 수많은 달달한 편지들이 다수 발견되었고, 심지어 다테 마사무네가 오사키 가문에게 패배한 후 벌어진 모가미와 다테와의 전쟁 때는 싸움을 말리기 위해 요시히메가 직접 가마를 타고 전쟁터에 당도하자. 그 모습을 보고 통곡하며 마사무네와 화의하고 물러간다. 그리고 이후에 보낸 편지에서는 [[츤데레|"그대를 생각해서 화의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쓰여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가족 사랑은 큰 비극으로 결말이 나는데.. 모가미 요시아키가 사랑하는 막내딸이자 절세의 미녀로서 동국 제일의 미녀라고 불리었던 코마히메가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처형 때 연루되어 연좌되어 15살의 나이로 시내에서 처형당한다. 당시 처첩들은 연좌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고 심지어 코마히메는 아직 히데츠구와 첫날밤조차 보내기 전이었는데, 모가미 요시아키가 히데요시에게 필사적으로 구명을 요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처형되었다.[* 말년의 히데요시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모가미 정도면 동북지방에서 힘 깨나 쓴다는 가문이고 굳이 원한을 만들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옥석을 가리지 않고 모두 처형한 것은 빼도박도 못할 실책이다.] 이에 요시아키는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쓰러졌다고 하는데 히데요시는 이런 모가미 요시아키를 코마히메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근신처분시키기까지 했다. 또한 사랑하는 외동딸이 사망하자 모가미 요시아키의 정실 부인이자 코마히메의 어머니었던 오사키 부인도 사망. 이후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잃은 모가미 요시아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며 반 히데요시파의 선두가 된다. 결론적으로 일화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매우 뛰어난 명군이자 인간적인 다이묘였으나 악당으로서 이미지가 강한 이유는 무엇보다 가문이 망해버리면서 모가미 요시아키에 대한 대부분의 역사적 기록을 적측인 우에스기+다테 가문의 역사기록에 의존하기 때문... 적국의 인물인데 당연히 좋은 사람으로 묘사할 이유가 없다. 또한 두 번째 문제는 드라마의 주인공 등 인기가 좋은 인물인 다테 마사무네와 나오에 카네츠구의 공통적인 적이라는 거. 당연히 악당 역할로 나오다 보니 좋게 그려질 리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촌구석으로 대접받거나 지역감정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도호쿠]] 출신 다이묘인 만큼, 요시아키도 향토애가 깊은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이가 들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죽기 전에 고향의 물을 마시고 싶다'라면서 귀향을 허가해 줄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덤으로 현대의 야마가타 현에서도 고향을 사랑한 이 인물의 인기는 매우 높은데, [[http://www.kankou.yamagata.yamagata.jp/db/cgi-bin/search/search.cgi?panel=detail&d01=101134071111571|이런 멋진 동상]]이 헌정되어 지방의 관광명소가 될 정도다.[* 역동감 넘치는 포즈도 그렇지만 말이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이 매우 비범한 기마상인데, 모가미 요시아키를 존경하고 있던 지방의 유지가 이 포즈를 구현하기 위해 엄청난 돈과 노고를 들여서 만든 것이라고. 덕분에 전국무장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한 박력 있는 동상을 가진 다이묘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